앙코르의 유적을 보기 위해 시엠립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하는 여행자는 이곳이 과연 연간 백만의 관광객을 수용하는 국제공항일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청사의 모습에 다소 의아하게 된다. 일년 내내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공항 내에는 단 한 개의 작은 에어컨조차 찾아볼 수 없고 커다란 선풍기 두어대 정도만이 붕붕 소리 내며 무더운 바람을 되새김 질 할 뿐이다. 자국 내 캄보디아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여행자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소위 어라이벌비자(Arrival Visa)라 불리는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따라서 비자가 발급되는 반 시간 동안은 별수 없이 공항의 무더움을 인내하는 훈련부터 감수해야 한다. 물론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갖추지 않은 공항인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캄보디아의 경제적인 현주소는 공항에서부터 웅변해준다.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를 연상케 한다.
시엠립은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약 330km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이곳의 원주민은 약 6만명 정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연간 백만이상이 된다고 한다. 시엠립이라는 말은 100여년 전 현재 태국의 시암족이 앙코르를 침공했을 때 용감히 싸워 이민족을 물리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으로서, 시엠립은 '시암족을 물리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곳의 주민들은 원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관광이 개방된 1993년도 이후부터는 80%가량이 관광업에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이 있는 지역은 완전한 평지처럼 보이는 거대한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지역으로서, 해발 150미터 정도되는 언덕 위에 조성된 프놈바껭 사원 이외의 모든 유적은 평지에 조성되어있다. 앙코르는 800년경 자야바르만 왕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기 전, 그러니까 6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현재 라오스의 남부지역 참파삭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에는 그 옛날 크메르인들이 힌두교를 받아들여 시바신을 숭앙하며 둥지를 틀고 도시국가를 건설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크메르인들은 이곳으로부터 남하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현재의 앙코르 유적이 있는 곳에서 왕성한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곳은 또한 800년대 초부터 이곳은 무역의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있으면서 많은 상인들이 오가다 장시간 머물게 되었고, 상업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앙코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근에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 '톤레삽'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앙코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도읍을 뜻한다. 앙코르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앙코르톰'이라는 지역을 들어가야 하는데, 앙코르는 도읍(都邑)을 뜻하고 '톰'은 '크다'는 뜻을 나타내므로 직역하면 대도시 혹은 대왕도(大王都)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도읍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 경 왕국의 수도로서 조성한 것으로서 각 변의 길이가 3km에 달하는 정사각형의 모양을 성벽이 둘러싸고 그 중앙에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바이욘 사원을 높이 건축하였으며 동서남북으로는 2개의 추축대로가 도시를 4분하게 하도록 하였다. 두 추축이 성벽과 만나는 지점에는 왕도의 문이 4개, 그리고 왕궁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로 위에 1개로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의 문은 앞면에 커다란 뱀을 껴안은 거인 석상의 열을 난간으로 한 다리를 끼고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탑문으로 되어있는데, 중앙의 바이욘 사원은 그보다 반세기 전에 조성된 앙코르와트와 함께 앙코르문화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돋보인다.
앙코르 왕국의 초기인 8세기에는 앞서 받아들인 힌두교를 중심으로 사원과 주요 건축물들이 조성되었으나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앙코르의 역사상 이 자야바르만 7세가 통치하던 12세기와 13세기가 가장 전성기로서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100만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숫자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암족, 참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받기 시작하고, 더구나 왕실 내에 현재의 나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 때문에 크메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타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사실, 그토록 융성했던 앙코르 왕국이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갑자기 정글 속으로 몇 백년동안이나 사라져 잊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확실한 해답이 없는 상태이지만, 시암(Siam)족 등 외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이라기 보다는 앞서 언급한 전염병의 창궐 때문이라는 설이 한층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프랑스의 탐험가에 의해 1860년 발견될 때까지 이 거대한 유적군은 수 백년간 정글에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1856년부터 1953년까지 거의 100년간 프랑스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 백년간 숲속에 파묻혔었다는 증거는 타쁘롬이라는 사원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마치 석조의 유적들이 거대한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 감기고 덮여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모든 영화가 자연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또한 느끼게 한다.
아무튼, 앙코르 문화의 초기인 9세기와 10세기의 건축물에는 벽돌문화가 도입되었고 11세기 초기에 이르러 석조문화로 바뀌게 되는데, 주로 사용된 돌로는 사암(沙岩)과 수성암(水性岩)이었다. 사암은 황토색과 분홍색 등 파스텔 색상의 돌로서 부드러워 조각하기 쉽고 습기에 강하므로 외벽의 정교한 조각을 하는데 많이 애용되었으며, 수성암은 매우 부드럽지만 일단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매우 단단해 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기초나 장식이 필요치 않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이 위에 목조문화가 첨가됨으로서 보다 완벽하게 예술성이 가미된 구조물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의 목조 기둥과 장식물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것들을 받치거나 고정했던 구멍들만이 돌 위에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사암은 이곳으로부터 약 60km 떨어진 프롬끌렌 산으로부터 톤레삽 호수에 뗏목을 띄워 운반하였고, 평지에서는 통나무를 바퀴 삼아 코끼리로 하여금 끌어 운반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축조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암의 조형물과 건축물에는 일절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사암의 조형물 중 걸작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진 바이욘 사원으로서, 1281년에 완공된 불교사원을 들 수 있다. 이 사원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으로 앙코르톰의 각 변에서 정확히 1.5km 지점의 정 중앙에 주 탑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54개의 주탑(主塔)이 있었으나 현재는 37개만이 남아있다. 특이한 점은 하나의 거대한 완성품을 위해 쌓아진 돌의 규격이 모두 틀리다는 점이다. 돌들은 접착제 없이 모두 지그재그로 쌓아져 있는데, 돌과 돌 사이에 원래는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조립되었고, 그 후에 조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쌓았었다는 증거는 역사적인 연대가 이를 증명한다. 만일 틈이 있었다면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공기가 들어가게 됨으로써, 따라서 자연히 이끼가 끼고 벌레가 들어가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틈이 더욱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800여년 이라는 세월동안 이렇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탑(主塔)으로 오르는 계단들은 무척 가파르고 보폭이 좁게 건축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오르내리게 하기 위한 계단이 아니라 신을 모시는 계단이라는 의미로서 신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의미로 설계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얼듯 보면 힌두교의 신들의 조각들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이욘사원이 불교사원이라는 것은 다시말하면 앙코르의 유적은 불교와 힌두교, 또는 반대로 힌두교에 불교가 가미된 그러한 믹스된 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거의 모든 앙코르의 유적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아무튼 앙코르의 유적 중 자야바르만 7세의 40년 재임기간 중 가장 많은 불교사원이 지어지게 되었다.
앙코르톰의 남문을 나와 1.5km를 내려가면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거대한 유적, 세계적인 불가사의라 불리는 앙코르와트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7년간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사원이나 궁전을 조성할 때는 풍수지리적인 방향을 무척 까다롭게 따져보았는데, 동쪽은 창조를 뜻하고 서쪽은 죽음을 의미하며, 남쪽은 자연을 나타내고 북쪽은 희망을 상징했다. 북쪽이 희망을 상징하는 이유는, 당시 앙코르의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시바신이 살고 있는 곳이 히말라야의 최고봉인 칼리아사 산(우리말로는 수미산이라 한다)이고, 이 영산은 캄보디아를 기점으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모든 사원은 창조나 자연을 나타내는 동쪽 혹은 남쪽으로 정문을 내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었지만, 앙코르와트는 유일하게 죽음을 나타내는 서쪽에 정문을 냈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것은 당시 왕의 권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은 신과 동격이었고 신으로 불리었으며, 죽어서도 왕이고 싶은 사후의 사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왕의 기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이름 수리야바르만을 보면, 수리야는 힌두교의 태양신 '수르야'를 바르만은 '나중의 보호자'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왕은 자신의 이름대신 수리야바르만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격화된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전으로 들어가는 서쪽 정문으로만 유일하게 석조의 다리를 놓은 것이 앙코르와트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리의 전면 양쪽으로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득도했다는 뜻의 상징적인 보리수가 두 그루 놓여 있다. 사실 이 사원은 원래 힌두 사원으로서, 힌두교의 신 비슈누와 자신의 합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어진 힌두 사원이었으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이 신상들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으로서 얼핏 보면 힌두 사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건축양식과 부조, 그리고 건물을 치장한 장식들은 완벽한 힌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 m 남북 1,300 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 m의 해자를 건너면 3개의 탑(塔)과 함께 날개모양의 회랑이 있으며,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길을 따라 470 m쯤 가면 사원의 본전에 다다르게 된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 m)이 4m, 제2회랑(115×100 m)이 12m, 제3회랑(60×60 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 즉 시바의 산 카일라사는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 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건축양식은 얼핏 보면 인도의 영향을 받아들여 지어진 듯이 보이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 760 m에 이르는 제1회랑 벽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 압사라와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코브라, 그리고 마치 주판알을 붙여 놓은 듯 한 창문 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 밤에는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약탈로 인해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 난 채 나뒹굴고 나중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버렸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혹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인도의 건축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에서 모든 유적을 관리하고 있다.
사실 캄보디아의 국민들은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암울하고 뼈아픈 상처를 가진 민족이라 볼 수 있다.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식민지시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찾아 정비하기도 전인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킨 론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엇다. 당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하누크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시하누크는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루주의 폴포트와 손을 잡게 된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외국에 있고 캄보디아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은 주공의 명에 따라 폴포트에 적극 협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75년에 론놀을 축출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자연히 실권은 폴포트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고, 시하누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루주'는 붉은 색을 의미하므로 크메르루주는 붉은 크메르군이라는 뜻이 된다. 아무튼 정권을 장악한 폴포트는 캄보디아를 명실 공히 자신의 수중에서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비롯한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킬링필드라 불리는 시절 15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로 사라져갔다. 단 한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혹은 단지 안경을 쓴 모습이 지식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외없이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시하누크는 이번에는 하는 수없이 베트남의 호치민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호치민은 이를 수락하여 월맹군을 급파하여 크메르루주와 대항하게 되었다. 1979년 결국 폴포트의 군대는 북쪽 정글 속으로 물러나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월맹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20년 가까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1986년 유엔의 개입으로 월맹군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오랜 내전과 많은 지식인의 학살로 생활은 궁핍할 때로 궁핍해지고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게 되었다. 1993년부터 관광이 개방되고 외국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월맹군에 의해 매설된 수많은 지뢰로 인해 많은 농민과 아이들이 장애자로 바뀌고 있으며,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짓게 한다. 아직도 이들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이곳의 아동병원이나 사원들의 입구에는 이러한 지뢰에 희생되어 팔과 다리를 잃은 아이들의 불쌍한 모습이 눈에 띄어 가슴을 메이게 한다.
쁘레아칸 사원 역시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조성된 불교사원으로, 쁘레아칸은 '신성한 도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이전 앙코르제국을 창시했던 자야바르만 2세가 신비한 효험을 지닌 보검을 지니고 있던 것을 자손인 자야바르만 7세가 이곳에 보관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이 사원은 특히 다른 보통 사원들과는 달리 앙코르톰이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도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서 넓은 부지와 견고한 회랑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곳의 보검과 주요 유물들은 1860년 프랑스인에 의해 발견되면서 대부분 도굴되어 버린 듯 하다. 앙코르 왕조의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왕의 이름은 자야바르만 7세로, 그는 최초로 불교를 도입하였으며, 사원을 많이 지었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극대화 함으로써 역대 왕 중에서 백성들이 숭배하는 유일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팔 걷어 부치고 이 말을 음미해보면 이렇게 많은 사원들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필요했었을까. 즉 얼마나 많은 무고한 백성들이 왕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폭정에 시달렸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자야바르만 7세가 다른 왕들보다도 폭군이 아니었을까하는 다소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나 혼자 뿐일까.
앙코르에는 유적이 많다. 수정이라는 뜻을 가진 따께오 사원은 언뜻 보면 경주의 다보탑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부의 벽에 부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에서는 앙코르의 대부분 조각들이 조각을 먼저하고 쌓은 것이 아니라 벽돌이나 돌을 먼저 쌓은 다음 조각을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몇 개의 부분적인 유적밖에 남아있지 않은 바푸온 사원은 11세기 중반 유다야티다야 왕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사암과 벽돌, 그리고 수성암이 혼합된 앙코르 문화의 전형적인 중기의 사원이다. 피메나카스 사원은 뱀의 여인에게 바쳐진 사원으로서, 대부분 수성암으로 지어진 초기의 앙코르문화를 대변한다. 1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외벽에는 정교한 조각이 없고, 평범한 돔과 붉은 색의 수성암, 그리고 검은 색의 사암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밤이 되면 아리따운 여인으로 둔갑하는 이 뱀의 여인은 왕이 아내와 동침하러 가기 전에 반드시 들러서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무서운 신이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용(龍)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여기의 뱀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바로 그 용을 상징하는 것인데, 용은 신이고, 따라서 왕의 몸에는 항상 신성한 신의 피가 흐른다는 의미로서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니핀 사원의 경우, 규모는 작지만 히말라야의 정상인 수미산(카일라사)과 그 밑에 있는 아나바타파 호수를 의미하는 우주의 정상과 치료에 효험있는 신비한 온천수가 4대 강으로 흘러내려가 네 개의 호수를 이루고 있는 구조의 형태로서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불의 형상을 수사학적으로 해석하여 조성해 놓은 사원으로, 중앙의 탑은 수미산을 나타내고 주위의 호수 4곳은 바로 그 4대강으로부터 흘러내려 만들어진 삼라만상의 호수를 의미한다. 다른 사원들과는 판이한 색다른 구조의 형태로서, 우기 철에는 물에 잠기게 되어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인 '닉핀'은 또아리를 튼 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의 법에 의하면 법장 보살은 과거의 부처이고 석가모니는 현재의 부처이며 아미타불은 미래의 부처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말의 석상은 미래의 부처인 아미타가 물에 빠진 상인들을 구하기 위해 변신했던 말 '발라하'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람 석상은 보살을 의미하며, 사자는 보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앙코르의 유적들이 여행자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앙코르의 유적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스케일면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비록 오랜 세월 방치되고, 상당부분 도굴당하고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앙코르의 유적은 과거의 웅장함과 영광을 말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일한 언덕인 쁘놈바껭 사원에서 동쪽의 앙코르와트와 서쪽의 지는 해를 동시에 바라보면, 한때를 풍미했던 모든 영광과 권력도 결국은 덧없는 한 순간의 꿈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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