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붓다> 2003년 1월호
우아한 호리병 모양을 하고서 천년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 시내 한복판, 과거 찬란했었을 궁성 반월성 앞 동북쪽 넓은 광장에 자태를 뽐내고 서있는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시기인 64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의 대표적인 자랑스러운 과학 유물이다. 그 명칭에서부터 '별(星)을 보는(瞻) 대(臺)'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첨성대(瞻星臺)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 관측대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천문학자들도 약 9m 높이의 첨성대 위에 목조 건물을 세우고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가설해 상설적으로 천문관측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가 어떻게 천문 관측대일까 의문을 던질 것이다.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 관측을 하기에는 너무 힘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 9m 높이 위의 정상 부분은 상설적인 관측 기구를 설치하기에는 너무 좁고, 설사 기구를 설치했다 하더라도 그 높은 곳에까지 오르내리려면 한바탕 곡예를 해야 한다. 즉 정남향으로 나 있는 중간 부분의 창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다음, 거기서 부터는 원통형의 내부로 기어 들어가 내부의 돌출된 돌들을 붙잡고 암벽타기 하듯이 정상부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첨성대가 다른 용도의 구조물이었다는 주장들이 나온 배경이다. 이설들 중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해시계인 규표(圭表)였다는 것, 고대의 천문사상과 수학 지식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었다는 것,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다는 것 등이 있다. 이외에도 첨성대는 고대 신라의 불교 신앙과 관련된 구조물이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우주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수미산(須彌山)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과 수미산 정상 위의 33천, 즉 도리천( 利天)의 세계와 믿음을 형상화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수미산설은 말 그대로 사진에 보이는 수미산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해 첨성대를 지었다는 비교적 개략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도리천설은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시기의 정국과 도리천을 지배하는 제석(帝釋)에 대한 선덕여왕의 신앙심 등이 어우러져 첨성대라는 구조물이 생겨났다는 주장으로 7세기 중엽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三界) 중에 가장 낮은 단계인 욕계의 하늘은 육욕천(六欲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온 우주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수미산에 위치해 있다. 즉 사천왕과 그 중생들이 살고 있는 사왕천(四王天)이 수미산 중턱에 걸쳐있고, 그 위 수미산 정상에는 중심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해 네 귀퉁이에 각각 8천이 있어 도합 33천이 있는데, 이를 일러 도리천이라 부른다. 그리고 수미산 위 공중에는 야마천(夜摩天)을 비롯한 네 천이 층층이 위치해 있다. 번뇌와 죄업에서 완전히 벗어난 부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층층이 쌓인 하늘을 수미산을 통해서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신라 최초의 여자 왕이었던 선덕여왕이 바로 33천, 즉 도리천을 지배하는 제석천왕에 대한 신앙심이 독실했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던 신라는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남자 계승자가 없어지고 성골 여자인 큰 딸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선덕여왕이었다. 여자 총리 서리가 비준을 받지 못하는 가부장적인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선덕여왕은 정당하게 왕권을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국내에서는 왕위 계승 전후에 반란이 일어나 여왕을 위협했고, 외교적으로도 당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여왕을 남자로 교체하라고 압력을 가할 정도였다. 여자로서 힘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구차하게 생을 살았던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이는 여자이기 때문에 살아서 제대로 된 왕이 되지 못했던 그녀가 환생해서는 도리천의 왕이 되어 남자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 진정한 제왕이 되고자 했던 갈망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이러한 그의 염원과 불심을 첨성대에 담았던 것이다. 첨성대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27단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몸통 위 아래에 각각 2단씩의 받침대와 정상부가 있어 모두 31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첨성대를 받치고 있는 땅과 그 위의 하늘을 포함하면 모두 33단이 되는 셈이다. 결국 첨성대는 33천, 즉 도리천을 상징화한 것이며, 나아가 땅과 하늘이 33단 중에 하나가 됨으로써 첨성대는 현재 선덕여왕이 다스리는 이 땅의 인간 세상과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하늘 나라를 연결해 주는 우주목(宇宙木) 구실을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선덕여왕은 살아서는 저 하늘에 계신 도리천의 제석천왕에게 의존하고, 죽어서는 도리천에서 남자로 다시 태어나 부처나 도리천의 제왕이 되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죽어서 경주의 남산에 묻혔는데 신비롭게도 그가 죽은지 30여년이 지나 그의 무덤 아래 쪽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지어졌다고 한다. 사천왕이 위치하는 곳은 수미산 중턱이고 그 위 정상이 바로 도리천이 아니던가. 선덕여왕은 죽어서 정말로 도리천에 묻힌 셈이다. 그가 도리천에서 남자로 환생했다면 그의 염원을 담은 첨성대의 약발(?)은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첨성대가 여자로서 구차한 여왕 노릇을 했던 선덕여왕의 불심을 담은 구조물이었다면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던 천문대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고대의 천문 관측 활동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달라서 종교 및 정치 활동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 땅의 세계인 인간 세상을 책임지고 다스리는 제왕(帝王)으로서는 하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가에 따라서 제왕으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땅의 현실 세계와 하늘의 도리천을 연결해주는 우주목이었던 첨성대의 정상에 올라가 별을 관측하는 것은 관측활동을 하는 것 자체로도 제왕된 자가 마땅히 챙겨야할 정치활동이었고 동시에 도리천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진실된 신앙생활이었던 것이다. 오르내리기 불편하고 관측하기가 불편한 구조는 전혀 문제가 안되었다.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1500년전의 첨성대라는 유물을 통해서 부처가 되고자 염원했던 불심, 남자로 다시 태어나 사람다운 생을 살고 싶어했던 한 여자의 염원, 제석천의 권위에 의존해 현생에서 힘있는 임금이 되고 싶었던 한 제왕의 정치적 염원 등이 하늘에 있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의 건설과 충실한 별의 관측 활동으로 표출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1500여년 전의 과학활동은 현재와 달랐다. 불심이 바로 과학이었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