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7.22 돌로미티 지역 일기예보에 따르면 Passo Pordoi는 9시부터 맑아진다고 했는데, 잔뜩 흐리던 날씨는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거짓말처럼 맑아져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포르도이 정상 Sass Pordoi 행 케이블카는 9시부터 운행이 시작된다. 덕분에 아침 시간이 여유롭다. 조식 후에 호텔 앞 소파에 앉아 있으니 한적하다 못해 적막한 어제와 달리 주차장에 차가 속속 들어오고 포르도이를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등산로를 가득 채우고 있다.
호텔에서 짐을 정리하고 포르도이 케이블카 시작 시간에 맞춰서 승강장으로 나간다.
순식간에 Sass Pordoi 도착. 아래에서 볼 때는 맑았는데, Sass Pordoi에 오르니 머리 바로 위로 짙은 구름이 가득하다. 케이블카에 내려서 주변 사진을 몇 장 찍는다. 구름이 좀 많아서 올 때 다시 찍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나마 이때가 시야가 좋았던 거고, 내려갈 무렵에는 산 아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자 이제 포르도이 트래킹 시작 계획대로 Pordoi 케이블카 승강장 (Sass Pordoi, 2952 m) - 산 정상 (Piz Boe, 3152m) - 보에 산장 (Rifugio Boe, 2873m)를 지나서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돌아오는 약 2-3시간 정도 예상되는 코스이다.
627번 - 638번 - 627번 (노란색 하이라이트)를 따라서 가는 트렉
Sass Pordoi의 분위기는 허허벌판, 황무지 느낌 그 자체이다. 어떤 장소를 여행의 목적지로 정하게 될 때, 그곳이 주는 상징적인 이미지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혹자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데티포스 Dettifoss 폭포의 모습에 끌려서 아이슬란드를 여행했다는 사람도 있고, 영화나 사진에 영감을 받아 어떠한 곳을 여행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 돌로미티에 끌리게 된 것은 여행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보게 된 Sass Pordoi의 사진 때문이다. 넓고 평평한 바위로 이루어진 고산지대의 기묘한 분위기는 '어 이거 뭐지?'하는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돌로미티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고, 돌로미티가 Sass Pordoi 이외에도 다양한 매력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되면서 결국 이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동훈이는 Sass Pordoi를 높은 곳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 같다고 했는데, 평평한 바위로 이루어진 고원 사이사이의 깊은 협곡은 그랜드캐니언과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을 따라서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트레일을 따라 걷는다.
트레일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멀리서 쿵작쿵작 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허허 벌판에 무슨 음악 소리인지... 사실 어제 숙소 주인에게서 오늘 이곳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대해 들었기에 아마도 그 행사와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저곳이 바로 음악소리의 근원이었다.
운 좋게도 이 날은 1년에 한번 열리는 Dolomites Skyrace라는 산악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 대회는 2017년 올해로 20회 째를 맞이하는 대회로 Canazei에서 출발하여 Sass Pordoi 정상을 경유하여 다시 Canazei로 돌아가는 23.5km 거리 (12km 오르막, 11.5km 내리막)를 달리는 행사인데, Canazei의 고도 1450m에서 가장 높은 곳인 Piz Boe 3152m까지 1500m 넘는 고도를 뛰어 올라가는 좀 가혹한 달리기 대회이다.
레이스는 아침 8시 30분경에 Canazei에서 대회가 시작되므로 Sass Pordoi에는 10시가 넘어야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이 날 유난히 산을 올라오는 등산객이 많았는데 대회에 참석하는 친구나 지인을 응원하기 위해 함께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아침에 케이블카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과 함께 온 아저씨는 자기 친구가 이 대회에 참석해서 정상에서 응원하기 위해 올라간다고 했다.
까마득한 바위산을 걸어서 올라온 등산객들...
다시 허허벌판 위 트레일을 따라 트래킹 시작.
등산로는 처음에는 Rifugio Boe로 향하는 길과 Piz Boe 쪽 길이 같이 가다가 갈라지게 되는데, Rifugio Boe 쪽 길은 거의 끝까지 평지가 이어지는 반면 Piz Boe 쪽 길은 오르막이 계속된다. 2800m에서 3152m까지 약 350m를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머리 위에 있던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시야는 한치 눈앞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Piz Boe 오르는 길은 상당히 험하다. 쇠 기둥과 쇠사슬을 잡고 꾸역 꾸역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돌로미티는 대부분 관광객이 이용하는 트레일이 3000m 미만이어서 고산병을 경험하기 힘든데, 이 날 나는 Piz Boe에 가까워질수록 어지럽고 머리가 아픈 고산증을 경험하였다. 고산증이 있는 사람들은 몇 차례 경험하다 보면 어느 정도 고도에서 자신이 고산증 증세가 생기는지 알게 되는데, 내 경우는 Maui 섬의 Haleakala national park (3055 m), 요세미티 티오가 패스 (3031m), 그리고 이곳 Piz Boe (3152 m)에서 고산증을 경험하게 되었고, 모두 3000m가 조금 넘는 곳에서 중간 정도의 신체 활동에서 심한 숨 가쁨과 어지러움, 두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로써 나의 고도 한계는 3000m 임이 증명된 듯하고, 너무나도 아쉽지만, 그 이상의 고도를 여행하는 것은 나에게는 무리일 것 같다. 헉헉대는 나를 보면서 집사람은 "히말라야는 못 가겠네"라고 놀렸다. 정말 히말라야는 근처도 못 갈 것 같다.
헉헉대는 나를 뒤로하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동훈이와 집사람
호리호리한 아가씨가 내 옆을 슉 지나간다
드디어 정상 Piz Boe 도착. 하지만 주위는 구름에 갇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힘든 노력은 전혀 보상받지 못하고.. 구름이 많을 때는 Piz Boe 가지 말고 그냥 Rifugio Boe만 가는 것이 답이다.
Piz Boe에서 Rifugio Boe 가는 길. 경사가 급하고 바닥은 자갈길이라 걷기가 힘들다. 아가씨 한 명이 우리에게 이쪽이 Rifugio Boe 가는 길 맞냐고 말어보더니 축지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뛰어서 내려간다.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는 축지법 처자 - 트레일의 한쪽은 구름 때문에 정확히 볼 수는 없으나 절벽으로 추정된다.
내리막길을 한참 가다 보니 저 멀리 Rifugio Boe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길 한켠에서 미동도 없이 절벽에 기대어 서 있던 한 녀석이 있었는데,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오랜 시간 바라볼 만한 것이었음에는 이의가 없다.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를 반복한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Rifugio Boe와 Valley가 가려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고산증을 극복하며 Piz Boe를 오른 나의 노고가 보상을 받았다고 위로해 본다.
나를 버리고 저 멀리 가버린 집사람
Rifugio Boe 그리고 동훈이
Rifugio Boe
Rifugio Boe에 도착하니 이곳은 Dolomites Skyrace의 열기가 가득하다. Race 참가자 들이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듯하다.
Dolomites Skyrace - 이곳을 지나서 Rifugio 옆의 봉우리를 지나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하다.
우리는 산장 안으로 들어와서 추운 몸도 녹이고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맛있는 커피 한잔 마시면서...
동훈이는 Espresso를 시키면서 나보고 Caffe Corretto라는 걸 먹어보라고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시켜봤다
Caffe Corretto. 음~ 술이 들어간 에스프레소이다. 무지 독하다.
내려가는 길에는 skyrace 참가자들이 올라오는 길을 이용해야 했고, 그래서 race 참가자 무리를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해야 했다. 지금 올라오시는 분들은 순위와는 무관하게 완주를 목표로 하는 분들인 것 같다.
이 날 열렸던 제20회 Doloites Skyrace는 2시간 6분 20초 기록의 Jan Margarit Sole 이란 분이 남자 부분 우승을 2시간 36분 29초의 기록으로 Laura Orgue i Villa가 여자부분 우승을 기록했다. 이런 우리가 리프트 타고 Sass Pordoi 트래킹 한 시간과 비슷하잖아.
내려오는 케이블카에서
Sass Pordoi 아래에서는 이렇게 맑아 보여도 올라가면 어떨지는 알 수 없음.
Sass Pordoi에서 Piz Boe는 날씨가 좋은 날이 아니면 시간 및 고생대비 추천할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Piz Boe 대신 Rifugio Boe까지 왕복 트레일을 택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각된다.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지만 비교적 평이한 trai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