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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가면

Gower 2008. 4. 2. 13:33

세월이가면



박인환(朴寅煥,) 30세에 심장마비로 요절한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중퇴하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아픈 이별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
이별 바로 뒤에는 미련이지만 그 미련 뒤에는 환멸이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흘러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그 사람의 초롱한 눈매와 뜨거운 입술의 감촉은
다시 아련한 그리움으로 살아나 때때로 가슴을 적신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은성: 당시 새로 생긴 술집이었다.)으로 향했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고.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리사이틀이 열렸다.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방송 에서 샹송 을 해설 하던 작곡가 이진섭 은
보통 사람이 넘지 못할 기행 의 소유자 였던것 같다
소설가 부인 박기원 이 쓴글을 언젠가 보았는데,
어느 비오는날 방송국 에서 월급 받아 나오다,
가난한 후배 를 만나 대폿집에가서 만취 되었고,
주머니에 있는 돈 을 털어 주려 하자 그후배가 거절 햇겟다...,
화 가 몹시난 이진섭 은 흐르는 또랑 에 쭈구리고 앉아 현찰을 흘려 보내드란다.
움푹 파인 눈에 검은 얼굴...
근세를 살고간 댄디맨
방송 에서 자주 보았던 그의 모습 이 지금도 기억난다